주요콘텐츠로 건너뛰기

벧엘클럽하우스

새로운 꿈을 위한
세상의 작은 변화가 시작됩니다.


자유게시판

삼국통일의유레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우
댓글 0건 조회 2,680회 작성일 14-10-21 06:13

본문

·당 전쟁과 삼국 통일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당이 한반도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야욕을 드러내면서 웅진 도독부(공주), 안동 도호부(평양), 계림 도독부(경주)를 설치하였다. 이후 신라는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맞서 매소성(경기도 양주)·기벌포(금강 하구)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며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676) 하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은 당이라는 외세를 이용하여 이룩한 것이었고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까지로 대동강의 이남 지역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한계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자주적 통일이라는 점과 고구려, 백제의 문화 전통을 수용하여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의라고 말 할 수 있다. 또한 신라는 이전보다 넓은 영토를 갖게 되어 경제를 더욱 발전시켜 이전보다 풍부한 경제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확장 개념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이후의 외교정책과 경제적 토대

신라는 6C 이후 지증왕이 ‘왕(王)’호칭을 사용하고, 국호를 ‘新羅’로 확정하는 등 내부 체제를 정비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착실히 다져갔다. 정치적으로 법흥왕(514~540) 때에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적인 귀족 국가로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율령의 반포(520), 17관등제의 확립,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대등과 군사 행정을 담당하는 병부도 설치하였으며,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536)하여 대내적으로 왕권이 확립되고,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각을 가졌다.

한편 불교를 공인하여 고대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마련하였다. - 법흥왕대의 체제 정비는 전제 왕권 확립의 기반으로 평가됨 - 또한 진흥왕대의 화랑도의 제도화는 군사적인 통일의 배경 역할을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지증왕때에 우경을 시작(502)하였으며, 수리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또한 순장을 금지(502)하고 동시(東市)를 설치하였다. 이는 생산력이 크게 발전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것과 더불어 진흥왕대의 한강 유역 확보는 보다 넓은 농업 생산 기지의 확보와 더불어 많은 인민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국가 경제의 기반이 보다 확충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대외적으로 지증왕 때 우산국을 복속(512)시키고, 법흥왕 때에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낙동강 하류지역으로 진출(532)하였으며, 진흥왕 때 한강 유역과 중부지방을 모두 차지함으로 삼국간 항쟁에서의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