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씨성의 계보 ( 황준호 선생님 필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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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조 : 황 낙[黃 洛]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평해는 경상북도 울진군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근을어현인데,
고려초에 평해로 고쳤고, 현종조에 예주(영해)에 속하였다가 지금은 울진군에 속한 평해면으로 남아있다.
평해황씨의 시조는 중국 후한의 유신(儒臣)으로 서기 28년 구대림(丘大林)과 함께 사신으로 교지국(베트남)에 가던길에 풍랑을 만나 안아진에 표착하여 그곳에 정착세거한 황낙(黃洛)이다. 낙(洛)의 후손에서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의 3형제가 있어 그중 갑고가 기성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로 전하는 온인(溫仁)이 고려조에서 금오위 대장군, 태자검교를 지냈고 평해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은 온인을 1세조로 계대하면서 본관을 평해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온인의 8세손 희석(希碩)이 1388년 요동정벌때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이 개국하자 개국이등공신으로 지중추원사가 되어 평해군에 봉해졌고, 문하시랑 찬성사에 추증되었으며, 공조판서 유저(有定)의 아들 현(鉉)은 세종때 대사성을 역임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던 여일(汝一)은 동래진 병마첨절제사를 지낸후 참판을 역임하여 평해황씨 가문을 빛냈으며, 영조때 실학자 윤석(胤錫)은 익찬(翊贊)에 이르렀고, 그가 저술한 문집 [이재유고]와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는 오늘날 국어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해황씨는 남한에 총 30,200가구,
124,0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주요 인물
황온인
고려조에 금오장군·태자검교를 지냄.
황근
고려 때 사예를 거쳐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황진
고려에서 검교군기감을 지냈다.
황서
고려 때 평리를 지냈다.
황우정
고려 때 군기소윤을 지냈다.
황원로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 부사를 역임하였다.
황유중
고려 때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황종양
고려에서 호부 전서를 지냈다.
황태백
고려조에 자헌대부·형조 전서를 지냈다.
황용
시호는 충경, 고려 때 숭록대부 삼중대광보국에 이르렀다.
황유정
초명은 지정,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자헌대부·공조 전서를 역임하였다.
황희석
?-1394(태조 3)
고려·조선의 무신. 시호는 양무. 1388년(우왕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했고..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2등으로 지중추원사가 되어 평해군에 봉해졌다.
문하시랑찬성사에 추증되었다.
황현
1372(공민왕21)-?
조선의 문신. 전서 황유정의 아들로 1393년(태조 2) 춘장문과에 급제.
1407년(태종 7) 직강으로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직예문관 등을 역임한 뒤..
세종 초 대사성이 되고 1482년(세종10) 인수부윤을 겸했다.
학행이 뛰어난 당시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황응청
조선의 학자. 자는 청지, 호는 대해, 목사 황우의 아들로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
천거로 예빈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다시 연은전 참봉·장원서 별좌 등에 임명되었을 때 4가지 시폐를 개진하여 왕에게 받아들여지자..
진보 현감에 임명되어 민심을 수습했다.
얼마 후 벼슬을 내놓고 귀향, 조목, 박성·이산해 등과 교유하며 독서와 후진 양성으로 낙을 삼았다.
평해의 명계서원에 제향되었다.
황준량
1517(중종12)-1563(명종18)
조선의 문신. 자는 중거, 호는 금계, 황치의 아들, 이황의 문인.
1537년(중종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학유를 거쳐 지평이 되었으나, 앞서 부탁을 거절당했던 자가 언관이 되어 모함하자 외직을 자청..
신녕 현감으로 나갔다가 단양 군수를 지내고 1560년(명종15) 성주 목사가 되었다.
풍기의 우곡서원,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황여일
1556(명종11)-?
조선의 문신. 자는 회원, 호는 해월헌·매월헌, 황응경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고..
1576년(선조 9) 사마시를 거쳐, 158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여러 청환직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우고..
1594년 형조 정랑을 거쳐 1598년 진주사의 서장관으로서 종계변무의 서장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고..
1611년(광해군 3) 길주 목사가 되었다. 1617년 동래진 병마첨절제사를 지낸 후 참판에 이르렀다.
평해의 명계서원에 제향되었다.
황선신
1570(선조 3)-1637(인조15)
조선의 무신. 자는 사수, 1597년(선조30)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강화부 중군으로서 전사하였다.
병조 참의에 추증,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황윤석
1729(영조 5)-1791(정조15)
영조 때의 실학자, 언어학자로서..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와 그가 저술한 '화음방언자의해'는 오늘날 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황종흡
1854(철종 5)-1903(광무 7)
조선의 학자. 자는 원여, 호는 운파, 황동규의 아들로, 외전경사를 읽어 대의에 정통했다.
고금 명가의 묵적을 보며 힘써 연마하여 글씨에도 대성, 특히 초서가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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